해외여행/동유럽

[폴란드/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우울한 하루

핫셀 2009. 1. 25. 17:09

 

체코의 부르노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사실상 첫 일정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로 향했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폴란드 남부에 있는 오시비엥침(Oswiecim)이었다.
우리에겐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배경이 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아우슈비츠는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후 붙인 독일식 지명으로 원래 폴란드명은 오시비엥침이다.
그래서 폴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오시비엥침이라고 하지 않고 아우슈비츠라고 부르는것을 무척 싫어 한다고...

 

이곳에서 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는지, 어떤 처참한 생활을 했는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유골과 신발,안경,주방기구,의수족에 어린아이들의 신발과 옷가지 까지 산더미 처럼 쌓인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보면서
설명을 듣는 방문객들의 분위기는 침울해져 갔다.  그 보다 더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희생자들이 머리카락을 쌓아 놓은
곳이었는데 머리카락 색이 모두 희뿌연 색이었다. 독가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머리카락이라 그렇다고 했고
그 옆에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원단을 보면서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에 기분은 점점 더 우울해져 갔다.
 

집시와 유대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화물차에 실려 온 사람들은 선별 과정을 거쳐 노동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은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나치관리자들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에 따라 삶과 죽음의 길이
갈렸다고 한다. 또 강제노동자들도 중노동과 굶주림으로 병을 얻어 노동력을 잃게되면 독가스실을 거쳐 화장장의 연기로
사라져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100만~250만 명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기록에는
400만 명이 넘는  다고도 한다.

  

 

 

 

 

 

수용소 정문에 있는 'ARBEIT MACHT FREI' 라는 문구가 아치형으로 걸려 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을 하면 자유로워진다" 라고...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화장터의 연기로 밖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

죽을만큼 일을 하고 죽어서 화장터 굴둑의 연기로 사라지면 자유로워 진다는 말인가?

 

 

 

 

 

 

 

 

 

 

 

  

실내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서 밖에 나와서 기념사진과 전경 몇장을 촬영했다.

아마도 촬영이 허락되었다 하더라도 셔터를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는 즐겁게 여행을 와서 관광하는 곳이 아니라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참배지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수용소 운영에 따른 모든 비용은 독일 측에서 부담을 한다고 한다.

물론 과거에 대한 반성과 속죄의 의미 일것이다.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독일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 같다.

 

  

 

 

 

 

 

여행에서의 기념사진이 길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만큼이나

우울하고 무겁다.

 

 

 

 

 

 

  

수용소 책임자를 처형 했다는 교수대의 모습이다

한 사람의 책임자를 처형했다고 해서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지...

 

 

 

 

 

 

 

 

 

지금은 고압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도 손을 대면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버릴 것같은 기분이다.

이곳으로 탈출하려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우리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날의 날씨는 무척 좋았는데도

파란 하늘에 비치는 햇살이 상쾌함 보다는 을시년 스러웠고

수용소를 나올때 쯤엔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무엇으로 누르는 듯 무거웠다.

  

 

 

2008. 2. 3일 폴란드 오시비엥침에서